몇 년 전만 해도 기획자 + 디자이너 + 개발자의 조합은 제품 제작을 위한 하나의 유기체였다. 하지만 벤처 또는 스타트업같이 작은 회사들이 생기면서 그런 유기체가 무너지고 있다. 먼저 기획자가 만들던 와이어프레임은 구성원 간의 커뮤니케이션과 스케치로 대체되었다. 디자이너의 업무도 마찬가지다. 디자이너가 없어도 어느 정도의 디자인은 구현할 수 있도록, 모바일앱 개발툴에서 자체 UI 라이브러리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단돈 몇 불이면 각종 UI Kit과 Icon Set을 사다 쓸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실무에서 역할 감소뿐만 아니라 역할 자체의 비중이 줄었다고 생각한다. 얼리 스테이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품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디자인은 제품의 가치를 높이지만, 가치의 증명을 판가름하지는 못한다. 쉽게 말해 디자인이 좋아도 안될 건 안되고, 디자인이 나빠도 될 건 된다.
그리고 제품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정말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스타트업에서는 제품의 핵심적인 부분이라도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또한, 여러 피드백에 따라 빠르게 시도하고, 빠르게 변해야 한다. 그런데 디자인에 지나치게 신경 쓰면 스텝마다 짧게는 1주에서 길게는 얼마가 더 걸릴지도 모른다. 목업 만들고, 수정하고, 애셋, 스펙, 애니메이션 구현하고, 실제 제품에 적용하고… 디자인을 위한 이런 복잡한 단계들이 때로는 독이 될 수 있다.
디자인이 정말 힘을 발휘하는 스테이지는 제품의 가치가 어느 정도 증명되었을 때, 유의미한 트래픽이 발생하고 있을 때라고 생각한다. 즉 증명한 가치를 크게 증폭시켜야 할 때다. 앞서 말한 대로 디자인이 안될 것을 되게 만들어주지는 못하지만, 조금이라도 된 것은 더 크게 만들어준다. 사용자가 한 번씩 누르던 버튼을 2번, 20번씩 누르게 만드는 것, 사용자가 10초씩 보던 화면을 1분씩 보게 하는 게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보통 좋은 디자이너들은 픽셀 하나하나에 굉장히 집중한다. 나쁘게 표현하면 집착이겠지만, 나쁘게 표현하면 안되는 훌륭한 태도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스타트업에서 때로는 독이 될 수 있다. 물론 정해진 시간 내에서는 최대한의 퀄리티를 추구해야겠지만, 말한 것처럼 정해진 시간 내에서다. 그래서 디자인 일정을 잡기 전에 비즈니스 파트에서 요구하는 일정, 그리고 프로그래머가 필요한 일정을 먼저 따져야 한다. 이후에 디자인 일정을 잡고, 그 일정에서 가능한 최대의 퀄리티를 내면 된다. 일단 우선순위의 요소들만 페이지에 나오면 된다. 그 나머지의 디테일이나 애니메이션, 각종 아트웍들은 나중 이야기다.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는 디자인의 퀄리티보다 비즈니스의 타이밍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