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처음에는 정말 ‘디자이너처럼’ 비주얼이나 UX에 관해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품 관리의 측면까지 시야를 넓여야 했다. 빠르게 제품을 내놓고 또한,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는 스타트업에서 계속 심미적인 것들만 챙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즘 스타트업에서는 단순히 디자인만 하는 디자이너는 찾지 않는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제품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을 찾는다.
그런데 제품의 관점에 점점 몰입할수록 디자이너란 타이틀이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포토샵을 하는 시간보다 회의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디자이너 인맥보다 창업가, 개발자들과의 인맥이 더 쌓였다. 때로는 디자이너가 아닌 제품 관리자의 입장에서 디자인을 바라봐야 했다. 때로는 데이터 분석가의 입장에서 내 디자인을 숫자로 바라봐야 했다. 때로는 개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까지 내 머릿속에 그려야 했다. 그래서 혼란스러울 때도 잦았고, 여러 종류의 업무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도 쉽지 않았다.
스타트업 디자이너의 역할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브릿지라고 생각한다. 크게는 제품의 가치를 고객에게 전달하는 브릿지, 그리고 사무실 내에서는 비즈니스 파트의 아이디어와 목표가 실제 개발팀을 거쳐 제품으로 탄생할 수 있게 만드는 브릿지 말이다. 또한, 앞서 얘기한 것처럼 여러 종류의 업무 사이에서 효율성과 교통의 원활함을 갖춘, 흔들림 없이 중심이 잡힌 브릿지가 되어야 한다.
세상 모든 게 구체적인 가치들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다. 무수히 많은, 때로는 설명하기 힘든 추상적인 가치들이 하루하루를 지배한다. 그리고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는 이런 여러 가지 추상적인 가치들을 구체적으로 연결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스타트업에서는 정말 매일이 새로운 도전이고 새로운 시험이다. 매일 새로운 에피소드로 구성된 시트콤을 보는 기분이다. 내일은 또 어떤 에피소드가 기다리고 있을까. 또 내일은 어떤 도전과 시험에서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