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간 3개의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공교롭게도 3개 회사 모두 스타트업이었거나 스타트업스런 조직이었다. 중간중간 외주 업무도 많이 했었는데 일의 규모보다 성취감이 초라했고, 왠지 그런 일뿐인 것 같은 선입견에 웹에이전시는 관심이 없었다. 대기업에서 제의를 받았을 때도 지금까지 편하게 하고 싶은 대로 일하다가 큰 시스템에 들어가려니 왠지 겁이 나서 고사했다. 그러다 보니 계속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동안 다양한 경험을 했다. Junior였던 적도 있고, Lead였던 적도 있으며, Co-Founder였던 적도 있다. 우연한 기회로 실리콘 밸리에 가보기도 했고, 싱가포르에 법인을 세우고 동남아 각국을 오가며 일한 적도 있었다. 나보다 어린 CEO를 모신 적도 있고, 친한 형님을 모신 적도 있고, 외국인을 모신 적도 있다. 현재는 처음으로 여성 CEO를 모시고 있다.
이렇게 예측불허 다양한 경험을 하는 동안 매순간 디자이너로서 성장에 대해 고민했다. 그 결과는 ‘먹구름’이었다. 이왕 하는 거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잘하게 되는지 뚜렷한 방법은 없었다. 프렌즈팝콘처럼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어떤 명확한 방향같은 게 없었다. 그래서 오랜 경력의 에이전시의 팀장님과도 이야기해보고, 명문대 시디과를 졸업한 분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유료 강연도 들어보고, 해외에 올라온 글도 열심히 읽어보았다. 매번 가슴에 닿는 좋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결국 좋은 이야기로 끝났다. 실제로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치열한 나의 현실에서 절실하게 실행해볼 만한 솔루션은 없었다.
그렇게 먹구름에 둘러싸인 채 30대가 되었다. 그리고 나보다 젊은 디자이너들과 일하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그들 역시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나 혼자 잘하는 것만 아니라, 그들에게 명확한 방향을 보여줘야 하는 새로운 의무와 책임이 생겼다. 하지만 먹구름에 싸인 것처럼 그들에게 명확한 솔루션을 제시하지 못할 때마다 자책하고, 부끄러웠다. 그래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골목길만큼 좁은 방향이라도 먹구름 속에서 내가 찾은 방향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