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에게 포트폴리오(+레쥬메)는 굉장한 이득이다. 보통의 이력서나 자기소개서와 다르게, 정해진 형식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내 마음대로 구성하여 나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디자이너가 포트폴리오를 만드는데 사활을 건다. 심지어 관련 강의까지 생길 정도다. 그런데 정말 공교롭고 역설적인 것은, 많은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가 결국에는 대부분 비슷한 형식을 띤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모티브로 한 로고, 타임라인 형식의 경력 기술, 프로그레스바로 표현한 툴 능숙도(최저/최대가 어떤 기준인지는 알 수 없다), 디바이스 목업을 적극 활용한 UI 갤러리 등 여러 전형적인 형식이 있다. 사실 이쯤 되면 내용만 살짝 바꿔도 다른 사람의 포트폴리오로 둔갑할 수 있는 ‘템플릿’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이렇게 포트폴리오가 독창적 보다 전형적인 모습을 띠는 이유는 ‘있어 보여야 한다’라는 잠재적 목표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있어 보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고퀄의 디바이스 목업을 구해 나의 이미지를 끼워 넣기만 해도 어느 정도 있어보이는 비주얼이 나온다. 하지만 남들이 다 할 수 있는 것은 특별하지 않다. 또한, 남들이 다 했던 것은 내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포트폴리오를 만들 때 중요한 것은 트렌디한 형식이나 있어 보임이 아니라, 내가 구성한 형식과 나에게 ‘진짜 있는 것’이다.
경력 기술
“이 회사에 다니는 동안 어떤 포지션에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일을 하였음.”
대부분의 레쥬메에서 경력 기술은 서너 문장으로 끝난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졸린 눈 비비며 뜨겁게 불태운 시간을 두루뭉술하고 짧게 요약하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나. 짧은 기간이라도 그 회사에서 나는 분명히 많은 갈림길에 놓였고, 많은 결정을 했으며, 많은 피드백을 받았다. 물론 이것저것 길게 다 쓰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뻔한 문장 등의 전형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표현하는 강력하고 독창적인 키워드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만난 어떤 디자이너는 억대 월매출을 내는 소셜 데이팅 서비스에서 앱 내의 결제 플로우를 전담했다. 결제 플로우는 특히 복잡다단하고 돈이 오가는 부분이라 중요한 플로우인데, 경력 기술에는 그냥 모바일 UX/UI 디자인으로 퉁쳐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에서 ‘결제’라는 키워드를 뽑아낼 수 있다. 이 키워드는 돈과 관련되어있고, 또 복잡한 숙제를 풀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월매출액이라는 숫자를 통해 증명된 키워드다. 한편, 다른 어떤 디자이너는 팀 내에서 낡고 느린 업무 프로세스를 몇 가지 세련된 협업툴을 이용해 개선한 경험이 있었는데, 레쥬메에는 쏙 빠졌다. 프로젝트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팀 내의 문제, ‘프로세스 개선’ 역시 특별하고 차별되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
모든 디자이너가 똑같은 생각을 하거나 똑같은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다만 각자의 경험에서 특별한 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찾아본 시간이 없을 뿐이다.
프로젝트 소개
“이 프로젝트는 뭐하는 것인데, 어떤 컨셉으로, 몇 퍼센트 참여하였음.”
프로젝트 소개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경우 있어 보이는 비주얼과 함께, 어떤 프로젝트인지 소개하는 말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포트폴리오를 받게 될 회사는 이미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으므로, 디자이너가 이전에 진행했던 프로젝트의 소개나 컨셉에는 큰 관심이 없다. 다만 디자이너가 어떻게 일했는지 궁금할 뿐이다. 따라서 프로젝트의 소개보다는 나의 업무 방식과 경과를 설명해야 한다.
디자인하면서 어떤 고민을 하게 되었고, 따라서 어떤 방법들을 시도했으며, 최종적으로는 어떤 선택을 했는지. 또한, 단순한 이미지 나열이 아니라, 중요한 몇몇 페이지는 초기 시안부터 마지막 시안까지 변천사를 보여주고 각 변천 과정의 근거를 적어주는 것도 좋다. 마지막으로 디자인하면서 느낀 소회를 진솔하고 간단하게 적어주면 포트폴리오에 진정성을 더할 수 있다.
나의 디자인은 치열한 고민과 번뇌 끝에 나온 결과다. 단순히 이미지 갤러리를 만들 게 아니라, 치열한 고민과 번뇌를 매력적인 수사로 표현해야 한다. 이런 표현을 통해, 회사의 담당자는 전형적인 형식이나 비주얼 같은 흔한 프레임에서 벗어나 나의 문제 해결 능력을 보게 된다.
숫자로 말하기
숫자가 제일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회사와 직원의 가치는 각각 매출과 연봉이라는 숫자로 귀결된다. 그래서 회사와 내가 처음 만나는 포트폴리오에서도 숫자가 중요하다. 예전에 인터뷰한 어느 디자이너는 (구글 플레이에서 검색해보니) 50만 이상의 다운로드를 기록한 앱을 디자인했는데 실제 만났을 때 그 지표를 잘 모르고 있었다. 서비스의 규모와 디자인의 연관성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50만이라는 숫자는 포트폴리오에서 어마어마한 강점이 될 수 있다. 또한, 작은 숫자도 중요하다. 특정 페이지의 특정 버튼을 개선한 이후 그 버튼의 클릭률 상승 지표, 어떤 페이지와 다른 어떤 페이지의 연결 플로우를 개선한 이후 체류 시간의 상승 등 작은 지표라도 ‘말하는 숫자’를 갖고 있다면 말그대로 화룡점정이다.
그리고 숫자와 숫자를 연결하면 가끔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한다. 나의 경우 지금까지 재직 회사의 평균 직원 수가 6.7명임을 언급한다. 사실 중요한 숫자는 아니지만, 다음으로 이어지는 숫자: 마케팅 없이 초기 제품 디자인으로 900만 다운로드라는 기록과 대비하였을 때 작은 회사에서 상대적으로 큰 결과를 이루었다는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었다.
자잘한 것
- 담당자가 포트폴리오의 모든 텍스트를 모두 읽는 경우는 없다. 반도 읽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따라서 문장보다 키워드, 숫자, 그래프로 표현하는 게 좋다.
- 포트폴리오 웹사이트를 만드는 것보다 PDF 파일 하나가 좋다. 단순한 형식에서 나를 표현하는 연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포트폴리오에 삽입한 이미지의 실제 픽셀 파일을 따로 첨부하는 게 솔직하고 좋다.
- 한글 맞춤법뿐만 아니라 ‘영어 맞춤법’도 중요하다. 내가 받아 본 포트폴리오에서 단수와 복수의 쓰임이 잘못되었거나,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영어 표현의 경우가 매우 많았다. 차라리 영어를 쓰지 않거나, 쓰더라도 주변 인맥을 통해 검수받는 게 좋다.
- 경력이 없는 경우 내가 자주 쓰는 서비스에서 느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 Re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포트폴리오에서 작업 과정을 소상히 설명하는 게 좋다. 포트폴리오 대부분이 대학 과제로 채워진 경우에는 오히려 대학생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
디자이너 구인 과정에서 느낀 것
지난해 우리 회사의 디자이너 채용 과정에서 60분의 포트폴리오를 검토했고, 10분을 인터뷰했으며, 최종 디자이너 2분을 회사로 모시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실제로 많은 지원자께서 우리 회사의 가치와 제품에 대해 공부하고, 좋은 지적도 해주셨다. 하지만 디자이너라는 포지션과 커리어를 떠나, 우리 회사가 진짜 자신이 일하고 싶은 회사라고 생각하는 분은 찾기 힘들었다. 물론 지금과 같이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한 시대에 이런 논의 자체가 넌센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트폴리오를 보내기 전에 그 회사의 비전과 제품이 진정 내가 함께하고 싶은 것인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자주 이직하게 되고, 연차가 쌓여도 내 일에서 깊은 가치를 찾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덧붙여서 개인 정보가 포함된 이력서는 보내지 않았으면, 아니 그 전에 회사에서 거부했으면 좋겠다. 지원자의 생김새, 동 호수까지 기재한 상세 주소, 심지어 아버님의 직업까지. 디자인 업무와 관련 없는 개인 정보를 입사도 아닌 지원 단계에서 회사에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런 개인 정보가 채용담당자의 편견을 유발할 가능성도 있다.
꼭 스타트업과 관련있는 글은 아닙니다만, 그간 포트폴리오에 대해 적지 않은 리뷰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포트폴리오란 주제 자체가 지원자와 회사의 갑을 관계에 안에 있는 것이다 보니, 선뜻 나서서 뭐라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꼰대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이번 글을 쓰면서 많이 고민했습니다. 혹시 지나친 부분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