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산업혁명과 모바일 시대를 거치며, IT업계가 급속도로 발전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크고 작은 Web 또는 App 제품이 J곡선처럼 대거 등장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디자이너는 사용자가 제품에 랜딩하는 시점을 만들고 관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나 역시 그랬고, 주변에 연봉을 협상하는 다른 디자이너들과 이야기하면서 자주 느끼는 것은, 디자이너의 연봉이 생각보다 낮다는 것이다. 마치 양계장에서 계속 알을 낳는 것 같은 고강도의 업무 환경에서, 디자이너는 역설적으로 Creative한 결과를 요구받지만, 연봉은 그다지 Creative하지 않다. 무엇 때문인가.
Design Technician
IT 기업의 조직 구성부터 살펴보자. 물론 회사마다 그 형태가 다르겠지만, 양대 분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기획, 마케팅, 세일즈 등 사업을 기획하고 선전하며 판매하는 Business 파트. 다른 하나는 디자인과 개발 등 실제 제품을 만드는 Production 파트다. 대부분 IT기업에서 디자이너는 개발자와 함께 Production 파트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Production 파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높은 퀄리티의 제품을 만드는 것이며, 직원 개인에게 중요한 역량 또한 높은 수준의 기술이다.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보유한 기술의 깊이에 따라 제품의 퀄리티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디자이너의 기술 자체가 진입 장벽이 높지 않다. 디자이너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이 피그마, 스케치를 통해 UI를 디자인하는 일이다. 그런데 당장 Xcode를 써보자. 금세 머릿속이 하얘진다. 검은 화면에 개미만 한 코드를 타이핑하고 있는 백엔드 개발자를 보면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다. 한편 HTML/CSS는 디자이너 채용 과정에서 우대 사항으로 취급받지만, 개발자들은 대부분 기초적으로 파악하는 코드다. 따라서 단순히 기술의 깊이만 따지면, 디자이너의 그것은 Production 파트에서도 진입 장벽이 낮은 편이다. 진입 장벽이 낮다 보니 디자이너의 수는 많고, 공급이 많으면 당연히 단가가 떨어진다.
혹자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디자이너의 연봉이 별 차이 없다는 문제를 지적한다. 하지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진입 장벽 역시 별 차이가 없다. 10년 전 디자이너는 포토샵으로 디자인하고, 파워포인트로 가이드를 치고, 플래시로 인터렉션을 만들었다. 지금은 스케치, 제플린, 프레이머 등 새로운 툴이 등장한 것뿐이지 진입 장벽이 높아진 것은 아니다. 반대로 개발자는 어떤가. 최근 4차 산업혁명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인공지능이나, 가능성만으로 시가총액 200조를 넘어선 블록체인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HTML/CSS을 공부하는 법, 개발자와 효과적으로 협업하는 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Decision Maker
하지만 나는 이처럼 낮은 진입 장벽과 많은 공급을 떠나서 디자이너의 연봉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의 역할이 Production 파트에 국한된 게 아니라,라, Business 파트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디자이너 사이에서도 연봉이 낮은 편인 프로모션 디자이너의 업무를 살펴보자. 기업은 신규 회원 유치를 위해 프로모션을 기획하고 예산을 정한 뒤, 디자이너에게 작업을 맡긴다. 그런데 디자이너의 역량과 방향에 따라 사용자가 보게 될 결과물은 각양각색, 천지차이다. 그간의 기획과 예산을 포함한 기업의 프로모션 역량이 마지막 순간에는 온전히 디자이너의 머리와 손에서 결정된다. 디자이너가 사실상 최종의 Decision Maker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기획자 또는 마케터 입장에서 디자이너의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결국 다시 작업하는 것은 디자이너다. 직급과 상황, 그 밖의 여러 환경을 불문하고 어쨌든 마지막 결과물은 디자이너가 결정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권한이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프로모션 디자이너는 기획서를 토대로 빨리빨리 결과를 뽑아내는 테크니션으로 일하고 있다. 프로모션 기획 최초부터 디자이너가 참여하는 경우는 드물고, 디자이너 역시 Decision Maker로서 더 깊은 고민하기에는 이어지는 다음 또 다음 디자인 업무를 ‘쳐내기’ 바쁘다.
이처럼 디자이너가 굉장히 무서운 권한을 갖고 있지만, 실제 역할은 상대적으로 피상적이다. 일례로 Business 파트에서 사업계획서를 만들면서 디자이너와 함께 논의하는 회사는 정말 드물다. 아니, 단순히 공유하는 회사도 별로 없다. 디자이너 역시 사업계획서를 알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Decision Maker라는 중요한 역량과 Business 사이에 마치 선이 그어져 있는 느낌이다. Decision Maker가 Business와 가깝지 않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문제 아닐까?
How to Make a Decision
Co-founder & Designer로서 여행 스타트업을 창업한 경험이 있다. 당시 나는 디자인뿐만 아니라 비전, 시장 상황, 타깃 분석, 포지셔닝, 제휴, 투자금 활용 계획 등등등 회사의 비즈니스에 깊이 관여하고 공부해야만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 디자인 업무 프로세스가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항상 Dribbble과 Behance를 띄워놓고 포토샵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Co-founder의 경험 이후에는 여행 업계에 대해 공부하고, 여러 경쟁사 제품에서 실제 그들의 여행 비즈니스와 상품을 직접 체험해보고, 여행 아티클을 읽는 시간이 많아졌다. 유저 인터뷰를 할 때도 우리 앱의 UX와 사용성보다는 앱을 통해 우리 회사의 비즈니스를 이해하고 있는지 또한, 그들의 개인적인 여행 경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디자인할 때도, 계속 사업 계획을 되뇌며 어떤 디자인으로 우리 회사의 비즈니스를 뾰족하고 매력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물론 디자이너에게 기술은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디자이너의 더 깊은 잠재성은 풍부한 기술에 더해 사용자의 랜딩과 체류를 관리하는 Decision Maker의 역할에서 더욱 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툴 능숙도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등 업무 테크닉 자체가 디자이너를 고용하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회사의 비즈니스, 비전, 분기별 계획 등을 디자이너와 공유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환경과 구체적인 일정을 만들어야 한다. UX가 아무리 중요해도, 디자이너가 제품 출시 전에 올바른 Decision을 내리지 못하면 사용자의 경험이 무슨 소용인가. 물론 Decision Maker에게 좀 더 Decisive한 연봉을 주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