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디자인을 소비하는 행위에 굉장히 익숙하고, 때로는 많은 돈을 갖다 바칠 정도로 열광한다. 예쁜 카페, 멋진 차, 귀여운 캐릭터 등 평생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디자인을 소비한다. 특히 디자이너는 더 그렇다. 돈뿐만 아니라 비헨스와 드리블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디자이너가 소비한 디자인은 말 그대로 최후의, 최종의 결과다. 그리고 결과는 디자인이 시작된 계기와 수많은 과정의 매우 단순한 요약이다. 따라서 소비에 익숙한 디자이너는 계속 다른 누군가의 결과만 쫓게 될지도 모른다. 결과만 쫓게 되면 근원이 단단하지 않고, 이후 작업 과정의 방향성이 모호해진다. 디자인하면서 계속 헤매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는 좋은 결과가 나오기 어렵다.
따라서 소비 과정에서 디자이너의 주장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디자인의 비주얼에서 또는, 제품의 구조에서 이 디자이너가 어떤 느낌과 이야기를 주장하고 있는지 추정하고 해석해야 한다.
다음으로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주장을 하는 것이다.
결과를 쫓기 전에 우리 조직이, 그리고 내가 이 제품을 통해 사용자에게 주장하고 싶은 게 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공부해야 한다. 하루하루 내 주장대로 디자인이 나왔는지 확인하고, 주장이 약하면 보완하고, 문제가 있다면 수정해야 한다. 또한, 회사 동료들에게 내 디자인을 주장하고 설득해야 한다. 이같은 과정을 통해 디자인 과정에서 직면하는 수많은 장애물을 극복하게 되고, 마침내 사용자에게 내 디자인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주장하는 디자인이 거듭되면 내가 회사에서 돈을 받고 디자인하는 철학이 된다.
보통 UX를 얘기할 때 훌륭하고 편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물론 200% 중요한 얘기다. 하지만 그 전에 내 주장을 설정하고 전제해야 한다. 내가 무엇을 주장하는지 모르는데 사용자에게 어떤 훌륭한 경험을 줄 수 있나. 또한, 내 주장을 자신하고 신뢰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제품을 출시할 것인가. 물론 주장은 틀릴 수 있고 틀려도 된다. 틀리면 내 주장을 고치면 된다. 출시 이후가 더 바빠야 하는 이유다. 오히려 문제는 주장이 없거나, 나도 내 주장을 잘 모르는 것이다. 주장이 없으면 무엇이 문제인지 명확하지 않고, 당연히 명확한 해결책도 떠올릴 수 없다. 흔히 말하는 ‘문제해결 능력’도 나의 주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벤츠의 브랜드 이미지라고 하면 중후하고 신사적인 이미지가 쉽게 떠오른다. 그런 벤츠가 최근 실내외 디자인으로 경쟁사를 압도하며 매출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결과에는 ‘Sensual Purity’라는 벤츠의 새로운 디자인 철학이 있다. 섹시함을 강조하는 새로운 철학은 이전 벤츠가 갖고 있던 이미지와 대치되는 것이며, 때문에 결과를 만들기까지 적잖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런 철학을 몇 년 전부터 주장한 끝에 시장을 설득해냈다.
나는 어떤가. 이 회사에서, 이 팀에서, 이 제품에서, 이 페이지에서, 이 버튼에서 디자이너로서 회사와 동료, 그리고 사용자에게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친 몸을 이끌고 회사에 출근해 늦게까지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왜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