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s of Being Wild

RE: 포트폴리오 만들기

April 13, 2020

무려! 3년 전에 Product Designer (4): 포트폴리오 만들기라는 포스트를 올렸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시시한 이야기만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 같아 한숨이 나온다. 정작 메인은 빼놓고 변두리에 서브같은 이야기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중요한 것
은, 당연히 실력이다. 그런데 포트폴리오에 관한 많은 글을 읽어보면 대부분 구성과 표현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짜임새 있는 구조, 간결하고 명확한 키워드, 문제 제기와 해결 사례, 그리고 사소한 맞춤법까지. 분명 이런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고 해서 원단의 품질이 바뀌진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구성이나 표현이 아닌 지금까지 해왔던 프로젝트들의 이미지 즉, 디자이너의 실력이다.

물론 지원자 입장에서는 평가자가 작업 이미지 몇 장만으로 내 실력, 내 강점, 내 개성을 알 수 있을까? 게다가 기획이나 개발 제약 때문에 이게 다 내 실력은 아닌데? 라는, 불안감이 들 수 있다. 그래서 구성과 표현에 열을 올리게 된다. 그런데 평가자는 알 수 있다. 특히 평가자가 풍부한 경험과 실력을 갖췄다면 이미지 몇 장만으로 지원자의 실력을 알 수 있다. 지원자가 작업하면서 어떤 고민을, 어느 정도의 깊이와 수준으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는지, 그리고 전반적인 스킬의 숙련도와 완성도까지. 또한, 프로젝트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어도 사용성이 얼마나 편한지, 디자인에서 얼마나 직관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UI/UX 디자인은 다양성이 극단적인 분야가 아니며, 따라서 평가자가 경험이 많다면 이미 만들어봤거나 어떻게 만드는지, 얼마만큼의 시간과 비용이 따르게 되는지 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획과 개발의 제약이 없는 회사는 없다.)

가령 어떤 디자이너가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노션에 대충 프로젝트 타이틀과 이미지만 넣어서 지원해도 서류 심사를 통과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포트폴리오의 구성이나 표현은, 지원자의 실력보다 오히려 ‘성의’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런데 나와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라면, 일하는 성의보다는 결국 결과물이 제일 중요하지 않나. 그래서 드리블이나 비헨스에 이미지 몇 장 올려놓았을 뿐인데, 구글과 애플은 물론 많은 회사로부터 먼저 권유를 받는 사례도 나와 내 주변에 꽤 있었다.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만약 내 포트폴리오가 계속 통하지 않는다면 일단 포트폴리오에 열을 쏟는 일은 잠시 중단할 필요가 있다. 포트폴리오가 아닌 내 실력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는 법륜 스님께서 항상 하시는 말처럼, 눈을 살짝 낮춰야 한다. 눈을 낮춰서 내가 목표하는 회사보다는 조금 떨어지더라도 입사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고, 내 성향이나 기호와 잘 맞는 사업 아이템을 가진 회사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래야 같은 시간을 일해도 더 큰 폭으로 내 실력과 몸값을 올릴 수 있다.

물론 더 수준 높은 회사에서 수준 높은 동료 디자이너들과 일하면서 내 실력을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진정 내가 빠져들 수 있는 아이템을 다루게 될 때 디자이너로서 매일 직면하는 고민과 해결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그 깊이감과 폭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지게 된다. 그저 멋지고 훌륭한 드라마를 한 편 보는 것과 오덕후가 되어 드라마를 볼 때 내 감상의 깊이가 다른 것과 같다. 그리고 이런 깊이 있는 작업 방식은 일회성이 아닌, 다음에 다른 회사에서 다른 아이템을 만났을 때 똑같이 작용하게 된다.

다시 3년 전 포스트로 돌아가, ‘포트폴리오를 보내기 전에 그 회사의 비전과 제품이 진정 내가 함께하고 싶은 것인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라는 문장이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유일하게 건질만 한 문장 같다. 포트폴리오와 이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실력이고, 내 실력을 올리는 가장 빠른 길은 내가 진짜 빠져들 수 있는 일감이다. 그리고 이런 일감을 만났을 때 누가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구성하고 표현하라고 조언해주지 않아도, 어떻게 내 포트폴리오에 담아내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