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s of Being Wild
July 3, 2020

글 쓰는 디자이너

디자이너가 (회사, 협업 등 환경을 제외한) 개인의 업무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나는 글쓰기를 추천한다. 어려운 이유는 무엇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이 부족한지 알면 시간을 들여 다양한 시도를 하면 된다. 대부분의 어려움은 무엇이 부족한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이 부족한지 모르니 내가 이 디자인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글쓰기는 상황을 객관화하는 실마리를 준다. 디자이너도 사실 글 쓰는 작가처럼 매일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 글자라는 가장 기초적인 표현 수단만으로 창작을 제한할 때 더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게 된다.

내가 여기 블로그에 쓰는 포스트 대부분은 A4용지로 치면 1장도 안 되는 분량이다. 그런데 글감이 떠오르고 실제로 글을 써 올리는데 최소 2주, 길게는 한 달 이상이 걸린다. 먼저 글로 전달하려는 주제 즉, 내 주장이 정말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만한 가치가 있는지 계속 비판적인 시각에서 자문하고 따져보기를 며칠이 걸린다. 실제로 글을 쓰는 것은 더 어렵다. 어떤 흐름으로 각 단락을 구성할 것인지, 어디에 소제목을 넣을 것인지, 어떤 비유를 써 전달력을 극대화할 것인지, 어떤 사례를 덧붙일 것인지, 결정적인 문장을 처음에 꺼낼 것인지 아니면 썰부터 풀고 마무리 단계에서 꺼낼 것인지 등, 이렇게 글의 전반적인 골격을 그리는 것만 또 며칠이다. 그림이 안 나와 글쓰기를 포기한 경우도 많다.

글의 주제와 골격을 정하면 이제부터 치열한 줄다리기 같은 과정이 이어진다. 문장 하나하나를 써내는 과정이다. 어떻게 가능한 한 짧게 표현할 것인지, 많은 동의어 중 어떤 단어를 선택하거나 영어 표현을 써 더 강조할 것인지, 어떤 부분에 쉼표나 따옴표를 붙일 것인지, 논리적이어야 하는 글에서 어떤 문장만큼은 내 개인의 의지를 담아낼 것인지 등, 고민할 게 셀 수 없다.

이렇게 주제부터 골격, 그리고 문장과 단어 하나까지 고민하다 보면 A4 용지 1장도 안 되는 글을 수없이 고쳐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겨우겨우 글 하나가 나와도 끝난 게 아니다. 실제로 읽어보면 어떤 부분에서 흐름이 끊기거나 리듬이나 어조가 불규칙해 다시 고쳐 써야 한다. 그런데 고쳐 쓴 글을 내일 다른 시간에 다시 읽어보면 또 고칠 부분이 생긴다. 이런 과정을 며칠 반복해 겨우 블로그에 올렸지만 정말 어이없는 오탈자를 항상 발견하게 된다. 이때는 특히 버그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동료 개발자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디자인도 글쓰기와 정말 닮아있다. 글의 주제는 사업 아이템이고, 골격은 레이아웃이다. 단락은 섹션이고, 문장은 섹션의 각 엘리먼트 그룹이며, 단어 하나는 엘리먼트 하나다. 가능한 짧은 문장을 쓰려는 노력도 마찬가지다. 디자인에서도 ‘Simple is the best’는 불변의 진리 아닌가. 또한 이렇게 구조의 닮음뿐만 아니라 표현도 닮아있다. 글의 어조와 뉘앙스는 디자인에서 컬러톤이며, 비유는 아이콘과 같다. 맞춤법은 디자인에서 정교함을 만드는 Pixel Perfect 작업이다.

결국 디자이너에게 글쓰기는 글자만을 이용한 가장 기초적인 디자인 수단이 된다. 그리고 기초를 닦으면 기본기가 생긴다. 글쓰기를 반복해 기본기를 기르면 스케치에서 매일 보는 레이아웃, 색, 도형, 구분선, 아이콘 등 다양한 디자인 장치를 더 뚜렷하고 명확한 관점에서 사용할 수 있다. 사실 디자인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게 바로 폰트다. 그런데 폰트 역시 단순히 글자 모양이나 바꿔주는 아주 기초적인 장치 아닌가.

쓰기 전에 준비하기
요즘 나는 글을 쓰거나 회사에서 디자인 아웃풋을 설명할 때 또한, 내 결정이 필요할 때 특히 ‘~한 것 같다’는 표현을 가능한 줄이려고 한다. 이래서 좋은 것 같다, 그러므로 괜찮을 것 같다, 이게 더 나을 것 같다 등 이런 말은 자신의 주장을 확신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바이러스를 퍼뜨린다. 좋을 것 같다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거니까. 또한 내 주장에 확신이 없으면 듣는 사람도 내 주장을 흐릿하게 받아들이거나 확대・축소 해석하게 된다.

물론 ‘~한 것 같다’는 말투만 바꾼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근본적으로 내 주장과 표현에 확신을 가지려면, 확신이라는 보상을 받을 만큼 치열한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 하나가 ‘좋다’고 말하기 위해서, ‘좋을 것 같은’ 나머지 99개를 모두 시도해보고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혹시 내가 놓친 101번째도 있으니까, 내가 말하려는 주제에 대한 일상적인 관심과 공부가 필요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디자인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면 글을 써보자. 도움되는 ‘것 같은’ 것을 읽는 건 지금까지 수도 없이 읽지 않았나. 이제는 써보자. 이 플로우에서, 이 페이지에서, 이 버튼에서 내가 사용자에게 주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한 문장으로 이야기해보자. 물론 그 한 문장은 단순히 지어낸다고 나오는 건 아니다. 우리 사업이라는 방대한 이야기를 요약하는 여러 문장 중 하나니까, 그 방대한 이야기에 항상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준비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만약 뽑아낸 문장이 나쁘면 다시 준비해서 다시 쓰면 그만이다. 다시 쓴 문장이 나빠도, 적어도 무엇이 부족한지 하나둘씩 발견할 수 있다.

마침내 정말 좋은 문장이 나왔다면 기쁜 마음과 확신에 찬 자신감으로 사용자에게 당당히 이야기해보자. 그 이야기가 사용자에게 다가가는 날 즉, 출시일을 그 어느 때보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기다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