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s of Being Wild

무대 위에 선 배우

March 14, 2021

지금 회사에 입사할 때 경력이 10년이나 된 것을 알게 됐다. ‘아, 나도 고인물이구나..’ 그런데 그게 벌써 3년 전이다. 그동안 수많은 디자이너를 만났고 그들의 아웃풋과 성장을 지켜봤다. 오랜 지켜봄은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에 차곡차곡 데이터베이스처럼 쌓였다. 이제는 디자인 몇 장만 봐도 어느 단계에 있는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예상이 될 정도다. 특히 내 데이터베이스에는 굵고 새빨간 구분선이 있는데 놀라운 디자이너 10%에 대한 것이다. 물론 90% 역시 훌륭한 분들이지만 구분선 위에 10%는 특별함이 있다. 배우처럼 일하는 디자이너라는 특별함.

수없이 많은 디자이너 채용 공고를 보면, 어느 회사 공고를 봐도 정말 놀랍도록 비슷하다. 항상 나오는 말들: 문제 해결, 도출 및 설계,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주도적인 무언가, 정량적・정성적 분석 등. 분명 업계에서 바라는 표준 인재상이 있다. 하지만 10%의 특별함은 이같은 표준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그들은 자신이 만드는 제품에 대한 감정이입 아니, 인생을 이입해 서비스의 주연 배우가 된다.

그들에게 여행 서비스를 디자인하는 것은 한 명의 여행가가 되는 것이며, 그들에게 교육 서비스를 디자인하는 것은 한 명의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문제 해결부터 어떤 분석까지 일련의 프로세스는 당연한 업무일 뿐. 그들은 정량적 분석보다 숫자로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의 깊이 고민하며, 정성적 분석보다 매일 정성을 다해 사용자의 랜딩을 준비한다.

올해부터 일본의 음식배달 서비스의 디자인을 맡고 있다. 배달 음식은 많이 시켜봤지만, 음식 장사나 배달은 해본 적이 없으니 가맹점주나 라이더는 미지의 세계다. 물론 우리 기획과 경쟁 서비스를 열심히 분석하면 모를 것은 없다. 하지만 기획과 분석만으로 내가 우리 사용자들을, 실존하는 인간으로서 대변할 수 있을까?

디자인 과정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음식 배달이다. 하필이면 비가 억수로 쏟아진 겨울날 김밥으로 시작해 짬뽕, 치킨까지 땀나도록 배달했다. 그동안 지금 쓰고 있는 타사 라이더앱이 어쩜 이렇게 잘 만들었는지 내내 감탄했다. 반대로 바쁘게 이동하면서 사용하는 UX는 다른 차원임을 깨닫고, 그런 차원에서는 개선점도 많이 보였다.

그런데 제일 중대한 배움은 UX가 아니었다. 마지막 감자탕 배달을 마치고 내내 맞은 비와 땀이 뒤섞인 채로 라멘을 흡입하며 느낀 기분, 보오람찬 하루 일을 끝마친 바로 그 기분이었다. 잠시나마 음식 배달을 하는 배우가 되어 느낀 순간의 감정들과 찰나의 헤프닝들. 이런 경험이 표준화된 프로세스 이상의 깊은 고민을 허락하고, 마침내 사용자에게 정성이 가득한 서비스를 배달해줄 것이라 믿는다.